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연인의 날 밸런타인데이로 기억하고 있지만,
2월 14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군대까지 해산시킨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조선은 식민지화 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서 1907년 12월, 안중근은 러시아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펼칩니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관을 만나러 하얼빈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로 계획하고 곧 실행에 옮깁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얼빈에서 벌인 일이기에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는 것을 기대했지만, 러시아는 재판을 일본에 넘겨버리고 맙니다.
결국 1909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고자 집필기간을 고려해 공소권을 청구하려 했지만, 법원장이 사형일자를 미뤄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공소를 취소합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묵살되었으며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집행 당해 순국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양 평화론은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 ④복선(伏線) ⑤문답’으로 구성된 집필 계획 중 서, 전감만 작성한 상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은 순국 5분 전 한복으로 갈아입은 안중근 의사의 모습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유해를 하얼빈 공원 앞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달라'고 남겼지만, 그 유언을 아직까지도 실행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독립을 위해 앞장서고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 ‘평화’를 외치던 안중근 의사의 희생을 잊지 맙시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 유언-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