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휴일이었던 주6일제인 시절,
대구 학생들에게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등교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집니다.
대구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28일에 있을 장면 박사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 하도록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2월 28일 대구 수성청변에서 부통령 선거 유세 중인 장면 후보(매일신문)
하지만 대구 학생들은 이러한 부당함에 가만히 당하지 않았습니다.
부당함에 따른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각 학교 학생들이 결의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벌이고자 계획한 것입니다.
그리고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은 학교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합니다.
학교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는 경북고등학교 이대우, 안효영(매일신문)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학생들은 수성청변 유세장으로 가면서 시위를 진행했고
시위현장에서는 약 2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학생들의 용기에 대구지역 언론 또한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시위는 3·15마산의거, 4·19혁명으로 확산되어 갑니다.
2월의 마지막 날, 학생들의 거침없는 돌진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다가가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보라, 스크램의 행진!
의를 위하여 두려움이 없는 10대의 모습,
쌓이고 쌓인 해묵은 치정 같은 구토의 고함소리.
허옇게 뿌려진 책들이 짓밟히고
그 깨끗한 지성을 간직한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불행한 일요일, 구루미 선데이에 오른
불꽃
불꽃!
김윤식 시인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 中
참고 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